희망과 소망은 다른가



  미국의 지도를 펴 놓고 보면,

동쪽의 반쯤은  푸른 색이고 서쪽은 태평양 연안 쪽으로 푸른 색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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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푸른 색의 의미는 산이 있거나 숲이 있는 지형의 표시이다.

그 중에 캘리포니아 주는 많은 다름을 품고 있는 주 (State) 이다.

사람으로 치면 등 쪽이 되는 곳에 길게 느리어저 있는 산이 있다.

산으로만 이어저 있는 여기에 걷게 만들어 놓은 길이 하나있다.  

이 길의 이름이 죤 뮤어 트레일 ( John Muir Trail)이다.

요세미티 국립공원, 킹스캐년 국립공원, 세코이야 국립공원 을 거치는 338,6 Km나 되는 걷는 길이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시작을 해서, 미국에서 높은 산으로 인정 받고 있는 휘트니 산에서 끝이 나는 등산로 이다.

고도 2,400 미터에서 부터 4,009 미터 까지의 높고 낮음이 있는 산길을 걸어야 한다.

백패킹(backpacking)을 하면서 트래일 전코스를 걷는데 약 3주가 걸린다고 한다.




 세계 3대 Trail 이라고 하는 곳은 미국의 J M T ,  

캐나다에 있는 The Coast Trail,

스페인의 Camino de Santiago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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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의 것은 길이는 77Km이지만 험하기로 유명하다.

스페인 것은 800Km나 되는데 너무나 잘 알려진 순례길이다.   

    나는 전 부터 이 세곳을 걸어 보고 싶어 했다.  


이런 나의 마음은 오래전 부터 품어 온 희망사항이였다.  

나이들어 가며 점점 이구석 저 구석이 부실해지는 나의 몸을 생각하면서,  

나의 희망 사항은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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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희망이란 것은 어두운데서 뭔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을 했다.

희망은 철저하게 각자 개인에게만 국한된 사항이다.  

희망 사항을 조석으로 바꾸어도 되는 듯 하다.

희망은 나만의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여러 사람의 희망이 모이면, 이것은 소원이 되나보다.

그러기에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라고 하지 않나.

우리의 희망은 통일이란 말은 들어 보지를 못했다.


희망과 소망의 차이는,  

희망이 자기중심적 미래상이라면

소망과 소원은 우리 모두의 미래상이다.

 희망을 버리고 소망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소망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희망(希望)은 바라는 바를 의미하며,  

소망(素望)은 믿는 바를 뜻한다.


성경에서 알게 된 것은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으뜸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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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만을 강요(?)를 하지 소망에 대한 이야기는 잘 듣기가 어렵다.

그런데 희망이거나 소망은 지금 것이 아니다.

미래에 나타날 것이라 믿어야 한다.

믿고 사랑 할 때, 소망이 이루어 진다는

성경적인 해석이 없어도 우린 많은 걸 기대하면서  살고 있다.



  한국 현대사의  과거를 돌아 보면,

참으로 많은 꿈을 키워야 할 시기에 엥겔지수만 높이는데 만,   

많은 시간을 할애 한듯 하다.

먹고 사는데만 급급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돌고 돈다 했던가.  

지금의 일본은 엥겔 지수가 한국 보다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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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고 잘 살아야 겠다는 국민의 소망은 한국인들은 이루어 낸 셈이다.  

소망은 여럿이서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겠고,

이루어지는 소망도 복수(複數)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희망이나 소망이나 행복을 찾으려면,

자기 자신부터 존중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들이 옆에 와도 미소지울수 있기 때문이다.


   희망은 길과도 같다.  

3대 트레일이란 곳도 처음엔 길이 없었다.

많은 사람이 찾게 되어 다니다 보니 길이 된 것이다.

희망은 다른 걸로 바꾸어도 된다.

대체로 개인의 것이기 하는 말이다.

그러나 소망은 바꾸면 아니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란 노래를 어려서 부터 불러 왔다.  

지금에 와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고 바꾸어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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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점점 추워질 것이다.  

우리 모두 건강하게,

이번 추위도 잘 넘겨야 한다는 것은,

노년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소망이다.

나이든 분들과 이야기 하다 보면 소망을 잃은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소망을 잃은 사람은 삶에 대한 애착이 점점 약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나이들어 갈수록 우리가 살아가는 근원은 바로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하고자 하는 신념이 있으면 젊어지는 마음을 갖게 된다.  

하고자 하는 의욕이 과하면 그 과한 만큼 늙어 진다.

이게 욕심이다.  


무얼 하겠다는 자신감이 있으면 그걸로 인해서 그 만큼 젊어진다.

즉, 희망과 소망을 갖고 있는 만큼은 젊어지고,

그걸 두려워 하면 늙어 진다.

지금 내가 존경하는 분은 80 넘은 분이 비록 동작은 느려도

매일같이 Fitness Center에가서 운동을 하시는 분이다.

매일 걷고, 근육운동을 하시는 그런 분이야말로 청춘의 마음을 갖고 있기에,

늘 미소가 얼굴에 그득하다.

 우리들의 선배의 미래는 우리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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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그림은 지난번 네델란드 암스텔담 여행 중에 

인상 깊게 본 그림이라서 올려 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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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 루벤스, 「로마의 자비(시몬과 페로)」, 캔버스에 유채, 1625, 186x155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페로는 젊은 여인이고, 그녀의 아버지가 시몬이에요. 
오해로 인해 중죄를 선고받은 
아버지는 굶어 죽을 때까지 물 한 모금 먹지 못하는 형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아버지를 살릴 수 있을까 궁리를 하던 페로는 꾀를 내었습니다. 
매일 감옥에 면회 가서 간수들이 보지 않을 때 몰래 자신의 젖을 먹이기로 한 거예요. 
그녀는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요. 
결국 아버지는 굶어죽지 않고 오해가 풀릴 때까지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인데요.

이 그림은 편하게 감상할 수가 없는 면이 있어요. 
딸의 효심을 전하기엔 아버지에게 젖을 물리는 딸이 너무 관능적으로 그려졌거든요. 
우윳빛 피부에 토실토실한 그녀의 젖가슴이 붉은 옷 위로 탐스럽게 도드라져 보이네요. 
화면 오른쪽 위, 창살 틈새로 간수 두 명이 호기심에 가득 찬 눈길로 침을 꿀꺽 삼키며 엿보는 모습이 결정적이지요. 
분명 자비스러운 여인이고 효성스러운 딸의 이야기인데, 
내용을 모르는 채 그림으로만 보면 흰 수염을 기른 욕정에 찬 노인이 여인의 싱그러운 몸을 신나게 탐하는 것 같아 불쾌한 기분마저 듭니다.

내용을 안다 해도 별로 다르지 않네요. 
늙은이가 자기 목숨 살려보겠다고 수치심 같은 것은 염두에도 없고, 
탐욕스럽게 생명을 취하는 것 같아 보이니까요. 
제가 너무 비뚤어진 시각으로 노인을 보고 있는 걸까요?
아무튼 제가 말하려는 것은 이겁니다. 
저 살기에 급급하여 수치심을 버리는 순간, 노인은 추해진다는 거예요.

저 살기에 급급하다는 말은 에로스(Eros)적인 본능에 충실하다는 의미거든요. 
자기 보존적이면서 성애적인 것이 합해진 삶에의 본능을 에로스라고 하는데, 
에로스는 늙음에 어울리는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늙음에 가까운 속성은 차라리 자기 파괴적이면서 궁극적인 소멸로 치닫는 타나토스(Thanatos)적인 충동이랍니다. 
물론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살기 위해 자기 꼬리를 먹으며 배를 채우는 뱀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서서히 죽어가는 양상이지요.


글 ;  이 주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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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로마인의 자비’는 로마시대의 어느 효녀를 그린작품이다. 
‘페로’라는 로마의 젊은 여성은 아버지 ‘시몬’이 옥에 갇혀 굶어 죽는 형벌을 받게 되자, 
매일 감옥에 찾아가 자신의 젖을 먹인다. 
그 결과, 굶어죽기는커녕,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아버지는 탄탄한 근육질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로마의 역사학자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쓴
'로마의 기념할 만한 업적과 기록들'에 나오는 내용으로, 
‘막시무스’는 로마 사람들 사이에서 
효와 우애, 애국심 등의 미덕이 더욱 고양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책을 집필했다고 한다.
 
‘시몬’이 걸친 검은 옷은 그의 비극을, ‘페로’가 입은 붉은 옷은 
자식으로서의 뜨거운 사랑을 표현한다. 
 
작품 속, 
두 남녀의 모습은 설명 없이 보면 바로 야릇한 춘화(春畵)같은 느낌이다.
젊은 여인이 육감적인 유방을 내 보이고 
나이 든 건장한 육체의 남성은 상대 여성의 유방을 빨고 있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친 부녀 관계이며
‘시몬’의 딸 ‘페로’는 굶어 죽게 하는 형벌을 받고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면회 갔다가 
거의 죽음에 이른 것을 보고서 자신의 젖을 물려준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로마 당국은 그녀의 숭고한 효도와 진정한 사랑에 감동해 ‘시몬’을 석방했다고 한다. 
 
‘루벤스’는 이런 상황의 작품을 두 번 이상 그렸으며, 
다른 작가들도 이 내용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어떤 작품은 간수가 젓 먹이는 장면을 훔쳐보는 작품도 있다. 
 
감방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혹독한 환경 속에 아버지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딸이 찾아가 아버지의 입에 자신의 젓을 물리는 장면은 
정말 효도의 극치이며 매우 감동적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효도는 가정의 기본이고 
나라의 도덕 기준이어서 그 무시무시한 
마제국에서의 형벌까지도 용서가 되기에 
‘로마의 자비’라는 명화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니들 부모님께 진정한 효도를 하는 겨? 아니라면 
당장 실현 하시게! 
효도는 공자 왈 맹자 왈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 바탕이고 
백 가지 행동과 만 가지 덕(德)의 근본이기에 당장, 
아니 영원히 실천하시기 바라네!” 

글  :  김 수 영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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