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사이스여, 안녕.

2005.09.21 14:12

green 조회 수:3589 추천:7

어떤 사람들은 열세 살이 되기 전에 이미 앞으로 자신이 알아야 할 어른들 세계의 모든 것을 알았다고 말한다.
그 나이로 성장이 멈추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삶에 대해 이제 더 알 것이 없어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이 말하는 <알았다>는 것이 <어른들 세계>의 어디까지를 포함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세상 어느 구석에나 그런 조숙한 천재들과 그  천재들을 조숙하게 만드는 환경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그런 쪽으로는 아니지만, 어릴 때 부터 공부에 관한 한 늘 천재 소리를 듣던 형은 틈만 나면 내게 놀리듯 말했다.
<너, 그걸 알아야 돼. 머리가 안 좋으면 평생 고생이다.>
혹은 <머리가 안 따라주면 나중에 손발이 일찍 고생하는 수밖에 없는 거지.>....(중략)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쩌면 형은 남보다 일찍 시작될 내 손발의 고생을 미리 알았던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중학교 1년생이었다.
그때 내가 알았던 세상은 얼마만한 크기였던 것일까. 한 번도 그 크기를 재본 적이 없는 것 같다....
.
중학교에 입학할 내 키는 140센티미터가 채 되지 못했다.
교복 바지도 두 번 걷어올려 입었다. 윗도리도 손을 내리면 거의 도포 수준이었다.
그래도 오래 입어야 하니까 어머니가 무조건 큰 걸 사 입힌 것이다.
거기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책가방 무게가 족히 4킬로그램은 넘었을 것이다.
처음 얼마 동안은 1주일 내내 그걸 한 번도 펼쳐본 적도 없고, 또 펼쳐볼 일이 없더라도 <동아 신콘사이스 영어사전>만큼은 꼭꼭 가지고 다녔다. ....
왜냐면 그것이 선생님한테나 급우들한테 내가 누군지를 말해주는 훌륭한 증거물이었기 때문이다.
또 서울로 올라가기 전 영어 공부에 대해 형도 그렇게 말했다.
<영어 공부는 다른 게 없다. 영어가 안 든 날에도 사전은 꼭 가지고 다녀라.> .....

처음엔 꿈도 참 야무졌다.
펼쳐보지도 않을 영어사전을 가방에 넣어 다니듯 어떤 식으로든 나는 선생님이나 급우들한테 내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애썼다.
작다고, 혹은 촌에서 왔다고 만만히 보지 마라.
영어사전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뭔가 남들 앞에서 크게 한번 잘난 척을 해보고 싶은데 그 기회가 영 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그 기회가 왔다.
<이 반에는 문교부장관이 누군지 아는 사람이 있나?> 5월 어느 날 국어 시간이었다.
솔직히 지금도 교육부장관이 누군지 모르고 사는 데 이제 갓 중학교에 들어간 놈들이 그걸 알턱이 없었다.
모두들 꿀먹은 벙어리처럼 선생님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데, 선생님이 묘한 힌트를 던지는 것이었다.
<문교부에서 발간한 책엔 장관 이름이 안 나오나.>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혼자소리로 선생님은 국어책을 이리저리 살펴보앗다.
나도 얼른 국어책의 제일 뒷장을 열어보았다.
그러나 펴낸이만 문교부로 나와 있을 뿐 장관 이름은 나와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책엔 혹시 나올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되는데, 저 혼자만 영악하고 저 혼자만 헛똑똑해빠진 내가 그 눈치를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나는 가방 속에서 얼른 다른 교과서를 꺼냈다.
생물과 물상을 한데 묶은 과학책이었는데 거기에 바로 장관 이름이 나와 있는 것이었다. 
겉장 제일 꼭대기 오른쪽에 <문교부장관 검정필>하고. 검씨라는 성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당장 우리반에도 감씨와 견씨 성을 가진 아이가 있는데, 그런 성이라고 왜 없으랴 싶었다. .....

나는 기운차게 손을 들었다.
<어, 그래도 이 반엔 아는 사람이 있네.>
선생님도 반가운 얼굴이었고, 나를 쳐다보는 급우들의 얼굴도 역시 콘사이스는 달라, 하는 것 같았다.
<누구지?>
나는 <콘사이스>의 명예를 걸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나라 문교부장관의 이름은 검정필입니다.>
<검정필?>
<예, 책에 나와 있습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낄 사이도 없이 선생님은 바로 포복절도를 했다.
선생님이 왜 웃는지 나도 몰랐고 아이들도 몰랐다. ....

형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넌 꼭 삼국지에 나오는 위연 같다. 머리도 안 좋은 게 꼭 나쁜 생각만 골라서 하거든.>
더러 천재들은 그렇게 앞날을 보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 다음날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다시는 콘사이스를 넣고 다니지 않았다.
이미 창피를 떨 만큼 떤 것이었다.
나의 열세 살은 그렇게 지나갔다. 단 한 번의 잘난 척으로 장관의 이름을 바꿔준 것말고는 세상 어느 일과도 상관없이, 내가 그것을 들여다본 적도 없었고, 그것이 날 들여다본 적도 없이.

  
  
<<이순원님의 장편소설 <19세>중에 첫장입니다.
아무리 읽어봐도 첫장 만큼 웃음과 생각을 자아내게 하는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주인공은 "콘사이스"에서 "헤이! 검정필"로 별명이 바뀌는 수난을 겪으며 19세로의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옛날 어느 시절 뒷주머니에 도끼빗과 타임지를 꽂고 다니며 헛발질 철학을 일삼던 청춘들이 있었죠!!
작가의 글 사이사이 설명이 감칠맛 나는 소설입니다
. 중략된 부분들 같이 읽으면 더 좋은데..선선한 날 친구삼아 읽어보세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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