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02. 10. (월요일) 맑음.

        오늘의 일정:
 
      ① 그랜드 캐니언 사우스 림 이동 일출 감상
      ② 그랜드 캐니언 이스트 림 투어 
      ③ 페이지(Page)이동 및 어퍼 앤틀롭 캐니언(Upper Antelope Canyon) 투어
      ④ 호스슈 벤드(Horseshoe Bend) 거쳐 모뉴먼트 밸리(Monument Valley Navajo Tribal Park) 도착

 
     그랜드 캐니언의 일출 시각은 대략 7시17분, 최소한 7시 이전엔 도착해야 하므로 아침 식사도 생략한 채 서둘러 출발하였다. 여명의 쌀쌀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40여 분을 달려 다시 남문으로 진입, 매써 포인트에 도착하니 이미 해는 지평선 위로 살짝 올라 와 그 너른 골짜기 한가득 금빛 햇살과 그림자를 쏟아부어 놓았다. 산화철을 함유한 캐니언의 사암층은 아침 햇빛을 받아 붉은기가 더욱 강해져 어제 일몰과는 또다른 황홀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고, 계곡 구석구석 짙게 드리운 그림자와 강한 대비를 이루어 입체감을 한껏 부각시킨다. 시리도록 새파란 하늘에도 흰 새털구름이 점점이 깔려 그 장엄한 풍광에 드라마틱한 효과를 한층 더하고 있다.
 


DSC_1234-922.jpg





DSC_1239-922.jpg





DSC_1242-922.jpg





DSC_1247-922.jpg





DSC_1250-922.jpg





     눈 앞에 펼쳐진 형언키 힘든 광경을 넋 놓고 구경하다 보니 해가 점점 높아진다. 다시 시동을 걸고 데저트 뷰 드라이브(Desert View Drive) 따라 동쪽으로 천천히 이동하였다. 야키, 그랜뷰, 모란, 리판, 나바호 포인트를 차례로 거쳐 데저트 뷰까지 오는 동안 각 포인트마다 차에서 내려 되도록이면 벼랑과 가깝게 접근해서, 비슷한 듯 각각 색다른 캐니언의 모습을 천천히 둘러본다. 포인트별로 조금씩 각도를 달리하여 음미하는 장엄한 그 협곡의 파노라마란! 조금씩 높아지는 태양의 고도, 끊임없이 움직이는 구름, 그 구름이 계곡에 아로새긴 그림자가 서로 어우러져 시시각각 변하는 그랜드 캐니언의 황홀한 아침을 어떻게 필설로 나타 낼 것인가. 그저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할 수밖에. 그냥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으나 또한 한 순간도 붙잡을 수도 없는, 흘러가는 세월같은 것.



DSC_1266-922.jpg





DSC_1269-922jpg.jpg





DSC_1284-922.jpg





DSC_1296-922.jpg





DSC_1303-922.jpg





DSC_1304-922.jpg





DSC_1307-922.jpg





DSC_1312-922.jpg





DSC_1325-922.jpg





DSC_1326-922.jpg





DSC_1323-922.jpg

▲ 사우스림의 최동단인 데저트 뷰(Desert View)




DSC_1332-922.jpg

▲ 데저트 뷰에서 본 동쪽의 전망



     11시 30분에 어퍼 앤틀롭 캐니언(Upper Antelope Canyon) 투어가 예약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 서둘러야 했다. 데저트 뷰의 전망대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다시 차를 휘몰아 동문을 빠져나온 후 64번 도로를 질주하였다. 숲이 끝나고 풀 한 포기 찾기 힘든 황량한 사막지대가 시작된다. 예전에 '인디언'으로 불리던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s : 이하 '원주민'이라 함)들의 거주지가 드문드문 눈에 띄이고, 도로 연변에는 보잘것 없어보이는 공예품을 좌판에 늘어놓고 파는 노점들도 가끔 보인다. 도로와 멀리 떨어진 곳에는 학교로 보이는 건물과 함께 제법 마을의 모습을 갖춘 동네도 있다. 이런 황무지에서 무얼 키우고 가꾸어 생계를 꾸려 가는 것인지.        
 


DSC_1347-922.jpg

▲ 원주민들의 임시 거주지? 사람이 살고 있진 않는듯.




DSC_1348-922.jpg

▲ US-89




DSC_1354-922.jpg





     어느 덧 US-89도로를 만나 좌회전하여 북상하면서, 도중 혹 새로 난 우회도로 US-89T를 놓치고 그냥 옛 길로 고고씽하지나 않을까 조금 긴장하였지만 막상 'Express 주유소' 갈림길에 다다르니 자연스럽게 US-89T로 진입할 수 있었다. 마치 예전부터 이 곳에 익숙한 것처럼. '미국자동차여행' 사이트의 아이리스님이 올린 공지를 참조하여 몇 차례나 구글맵 등으로 도상 연습을 충분히 해 두었던 덕분이 아닌가 한다. 어차피 기존의 89번 도로 입구에도 차단시설과 함께 경고 표지판이 있어 웬만하면 기존의 89번 도로로 잘못 진입하는 낭패를 당할 가능성은 매우 낮아보였다.



D33J8358.JPG

▲ US-89변의 황무지를 지나며


 
     내비상의 도착 예상 시간이 매우 빠듯하여 최고 속도를 넘나들며 조금 밟았더니 페이지(Page) 외곽에 위치한 투어 오피스엔 20분 정도의 여유를 두고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린 프라임 타임대로 알려진 11시 30분의 Sightseer's Tour 프로그램을 선택했는데, 약 100분이 소요되고 1인당 요금은 $48이다. 이 시간대를 제외한 시간대는 $37로서 약간 싸다. 사진 전문 가이드가 동행하고 140분이 걸리는 82불짜리 Photographic Tour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가족과 2시간 20분을 떨어져 행동해야 하는 고로 일찌감치 단념하였다.



DSC_1359-922.jpg

▲ 페이지(Page) 외곽의 앤털롭 캐니언 투어 오피스



    시간이 되니 약 30명 정도의 프라임 타임대 예약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모였는데 절반 정도는 동양계이고 우리 가족과 일본인 커플 2명을 제외하면 모두 중국인이다. 10여명씩 3팀으로 나누어 비닐로 지붕과 창을 만들어 가린 3대의 4륜구동 오프로드 트럭에 팀별로 분승하여 밸리 입구로 향하였다. 우리의 운전사 겸 가이드는 젊었을 적엔 피터팬에 나오는 타이거 릴리를 닮았을,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원주민 여성이다. 이 곳은 원주민 자치구이기 때문에 미 연방법 적용을 받지 않는 곳이고, 투어 프로그램도 원주민이 직접 운영한다. 물론 수익 일체도 원주민들에게 귀속될 것이다.





DSC_1361-922.jpg

▲ 출발 직전


 
      벌건 황토먼지를 일으키며 굴곡진 모래 언덕을 요리조리 몰아 가는, 나이 든 타이거 릴리의 오프로드 운전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심한 요동에 모두들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잡고 원심력이 작용하는 쪽으로 쏠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래도 다들 즐거워한다. 몇 년 전에 경험했던 두바이의 사막 사파리 투어가 생각났다. 입구에 도착하니 약 6~7대의 투어 트럭이 주차돼 있다. 타이거 릴리는 팀원을 집결시킨 후 간단한 투어 안내와 함께 즉석 사진 촬영 강좌까지 해 준다. "화이트밸런스는 오토 아니면 구름(Cloud) 모드로 세팅하라, ISO는 가능한 한 끌어올려 셔터 속도를 확보하라. 플래쉬는 터뜨리지 마라, 각 촬영 포인트마다 내가 시범을 보여줄테니 잘 보고 따라 해라." 등등.



DSC_1369-922.jpg

▲ 어퍼 앤틀롭 캐니언 입구




      슬롯 안쪽으로 들어서자 서늘한 바람과 함께, 마술과 같은 빛의 세계가 펼쳐진다. 어둡고 좁은 바위틈에서 펼쳐지는 그 붉은 빛의 향연이란! 들어선 지 채 5미터도 전진하지도 않았는데,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저마다의 언어로 탄식을 내뱉는다.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이 공간 속에 실제로 두 발로 딛고 서 보니 꼭 거짓말같기만 하다.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DSC_1380-922.jpg





     앤틀롭 캐니언 역시 장구한 세월이 만든 걸작품! 몬순기에 쏟아진 집중호우가 급류가 되어 사암 지대를 쏜살같이 흘러 가면서 무르고 약한 곳을 깍고 또 깎아 깊게 파 놓은 바위 골짜기다. 급류 속에 죽탕처럼 섞인 다량의 모래 알갱이가 바위벽을 빠르게 훑고 지나가면서 이런 마법같은 조각 작품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상류 지역엔 Upper Antelope Canyon(UAC), 약간 떨어진 하류 지역엔 Lower Antelope Canyon(LAC)가 있고, 우리는 지금 UAC에 와 있다. 가이드에 따르면, 지금도 비가 많이 내리면 우리가 걷는 이 곳으로 엄청난 물줄기가 흘러 들어오며, 계속 침식은 진행중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라 한다. 나중 자료를 찾아보니, 2006년 9월 말, 36시간 동안 지속된 급류로 LAC가 5개월 동안이나 폐쇄되었다고 한다. 



DSC_1385-922.jpg





DSC_1412-922.jpg





     캐니언의 내부를 걸어가 보니 두 사람이 겨우 비켜갈 정도로 좁은 곳과 여러 사람이 모일 수 있을 정도의 제법 너른 광장같은 곳이 번갈아 나온다. 붉은 사암의 벽은 이 곳을 통과해 간 유체의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듯 모난 곳 하나 없이 온통 수평 방향의 무수한 물결 모양 주름으로 부드럽게 웨이브져 있다. 머리 위 천장의 터진 좁은 틈으로 스며든 빛줄기가 캐니언 내부의 섬세하게 주름진 붉은 표면에 내려앉아 사방에 난반사로 흩어지면서 인공 조명으로는 흉내내기 힘든 환상적인 빛의 마법을 연출한다. 지금은 겨울이라 태양 고도가 낮아 햇빛이 직접 바닥으로 닿진 않지만, 바닥으로 폭포수같이 떨어지는 직광을 볼 수 있는 기간은 대략 3월 20일부터 10월 7일까지라고 한다.
 


DSC_1435-922.jpg





DSC_1440-922.jpg





     이렇게 한없이 부드럽고 아름다운 곳도 때론 악몽의 현장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1997년 8월에 LAC에 큰 사고가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급류가 투어 중이던 여행객을 덮쳐 11명이 휩쓸려 사망하고 가이드 1명만 큰 부상을 입은 채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다. 이 날도 캐니언 지역엔 거의 비가 내리지 않았지만 7마일 떨어진 상류 지역에 집중적으로 쏟아진 비가 깔때기로 모이듯 삽시간에 몰려 물폭탄이 되어 캐니언으로 날벼락처럼 들이닥치면서, 이것을 까맣게 모르고 투어 중이던 여행객들을 순식간에 휩쓸어 간 것이다. 8명의 시신은 파월 湖(Lake Powell)에서 발견되었고, 2명의 시신은 오랜 수색에도 결국 찾지 못했다고 한다. 2010년 10월엔 UAC쪽에도 갑자기 형성된 급류로 여행객들이 돌출된 바위 위에 긴급 피신하여 고립되어 있다가 나중 구조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영문 위키피디아 "Antelope Canyon"편 참조함)  이런 잠재 위험 때문에 UAC, LAC 모두 원주민 투어 가이드를 통해서만 관람 가능하다.



DSC_1445-922.jpg

▲ 머리 위 갈라진 바위의 틈을 통해 보이는 하늘 





DSC_1454-922.jpg

▲ 고개를 좌로 90도 돌리면 뷰트(Butte)의 형상이...




      내부는 광량이 부족하여 카메라의 ISO(감도) 설정을 많이 올려도 셔터 속도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의 노출 차이도 극단, 삼각대 사용이 금지되어 있으니 장노출은 언감생심이다. 게다가 끊임없이 오고가는 탐방객들로 내부기 무척 번잡하였고 사진빨 좋은 포인트엔 예외없이 긴 줄이 형성돼 있는데다 우리 무리에서 이탈하지 않으려 신경까지 써야하니 사진 찍기로선 나쁜 조건만 엄선해 놓은 셈이다. 어쨌든 흔들림을 줄여 보려고 벽에 몸을 밀착시키고 숨도 참으면서 기회 봐 가며 정신없이 찍었는데, 나중 확인해 보니 죄다 망했다. 모처럼의 기회였는데 포토그래픽 투어를 택하지 못한 것이 상당히 아쉬운 대목... 
 


DSC_1469-922.jpg

▲ 후문(?)



투어를 마치니 점심 시간, 가까운 월마트를 들러 치킨과 과일, 맥주 등을 구입하여 간단하게 점심을 대신하고 바로 인근의 호스슈 벤드(Horseshoe Bend)로 향한다. US-98 구 도로를 타고 잠깐 남행하다 보면 표지판과 함께 오른쪽에 주차장이 보이므로 찾기는 쉽다. 차에서 내려 그늘막이 있는 작은 구릉을 넘어 10~20여분을 걸어야 한다. 그늘막에서 호스슈 벤드 방향을 내려다보니 평지에 약간의 크랙만 보여 그리 실감나지 않았는데 가까이 접근해 보니 허걱 하고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는 엄청난 스케일의 물돌이 광경이 딱 펼쳐진다. '평지돌출'이 아닌 '평지함몰'이라고 할까, 산 하나 없이 사방이 펀펀한한 평지에 갑자기가 푹 꺼진 아득한 허방같은 절벽이 나타나니, 엉뚱하게도 어이없다는 느낌이 먼저 떠올랐다.  

 

DSC_1489-922.jpg

▲ US-89 변의 호스슈 벤드 주차장




     어쨌든 눈 앞에 펼쳐진 것은 헛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300미터가 넘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보면 정말 무시무시하다. 웬만한 사람들은 오금이 저려 가까이 접근할 생각조차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바위같은 데 올라 까치발로,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낮은 포복으로, 나 같이 간뗑이가 배 밖에 나온 사람들은 살금살금 고양이발로 벼랑 가장자리에 접근하여 강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내가 다행히 저 아래로 추락하지 않았음에 대한 일종의 안도감과 희열를 즐기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말 마따나 자연엔 자비 따위란 없는 것, 모르긴 해도 여기에서 실족하여 유명을 달리한 분이 없진 않을텐데 그 흔한 안전 난간 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자연이라니!  Everything Do You is At Your Own Risk!  난 이런 것이 너무도 좋다!

 

DSC_1496-922.jpg




      좌우로 펼쳐진 호스슈 벤드의 폭은 1200m 정도, 광활한 그 전경을 16mm 광각 렌즈로도 한방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다. 콜로라도강이 하회마을처럼 암반을 휘감고 돌아나가는 형상은 영월 동강의 한반도 지형을 연상케 한다. 그 형상이 말굽과 흡사하여 호스슈 벤드라는 이름을 얻었다. 

 

DSC_1522-922.jpg




     호스슈 벤드를 뒤로하고 오늘의 목적지인 모뉴먼트 밸리(Monument Valley)로 향하였다. 130마일, 2시간 20분에 불과한 짧은 이동거리다. 98번 도로를 타자마자 가족들이 모두 곯아떨어졌다. 나도 덩달아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더니 이내 주체할 수 없는 졸음이 몰려들었다. 음악을 크게 틀기도 하고, 창문을 활짝 연 채 목청 높여 노래를 불러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운전의 단조로움을 떨치려 크루즈 컨트롤을 끄고 제한 속도를 많이 초과하는 질주도 해 보았건만 좀체 수마에서 헤어나오기가 어렵다. 결국 도중 만난 공터 한켠에 차를 세우고 30분 가량 토막잠을 잔 다음에야 겨우 졸음을 면할 수 있었다. 



D33J8397.jpg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왼편 저 멀리 거대한 병풍 바위가 보여 이것이 'Rock Door Mesa'인가 했더니 좀 더 진행하자 드디어 모뉴먼트 밸리 표지판이 나타난다. US-163 도로를 버리고 나바호 부족 공원(Navajo Tribal Park Monument Valley)을 가리키는 팻말을 따라 우회전해서 들어가니 영화에서 많이 보던 거대한 돌기둥이 석양을 배경으로 하여 양쪽으로 우뚝 서 있다. 입장료를 징수하는 부스는 근무 시간이 끝났는지 닫혀 있고 덕분에 우리는 1인당 5불의 입장료를 절약할 수 있었지만, 푼돈 20달러가 굳은 기쁨(?)보다는 나바호족에게 무언가 빚을 지는 듯한 미안함이 앞선다. 이런 멋진 곳을 곳을 공짜로 입장하다니! 지난 해 초여름, 설악산행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울산에서 밤새 달려 새벽 3시 20분에 설악동 탐방지원센터를 통과하는데, 놀랍게도 그 시간에 절(신흥사)에서 보낸 매표원이 눈을 부릅뜨고 앉아 문화재관람료라는 것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쓸 데 없는 성실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씁쓸한 추억.


DSC_1577-922.jpg





DSC_1618-922.jpg

▲ 모뉴먼트 밸리 입구의 돌기둥(Butte)


 

     더 뷰(The View)호텔이 도착하니 서산에 해가 막떨어지려 하고 있었고, 언덕 너머로 진짜 모뉴먼트 밸리가 고스란히 펼쳐져 있었다. 그 중 거대한 메사(Mesa)와 이 곳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3개의 뷰트(Butte)가 석양에 물든 채 우람한 자태로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그 광경은 평소 영화나 사진으로 보던 모습 그대로여서인지 희안하게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우린 체크인도 미루고 해가 완전히 넘어 가 어두워질 때까지 언덕에 서서 밸리의 그 장관을 정신줄 놓은 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DSC_1591-922.jpg

▲ 모뉴먼트 밸리의 상징이라 할 삼형제 기둥.

좌로부터 East Mitten Butte, West Mitten Butte, Merrick's Butte.



DSC_1592-922.jpg





DSC_1597-922.jpg




     과연 더 뷰 호텔의 위치 선정은 명불허전 급이다. 모뉴먼트 밸리를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장소에 야트막한 3층 건물로 길게 지은 건물은 외벽도 붉은 색으로 마감하여 마치 메사처럼 보였고, 호텔 자체가 마치 밸리의 일부인듯 주위 경관과도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탓에 모든 시설이 청결하였고, 전체 객실에 동쪽으로 난 발코니가 딸려 있어 밸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우린 상대적으로 저렴한 1층의 방을 잡았지만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어 밸리를 감상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워낙 인기가 많은 호텔이라 성수기엔 일찌감치 예약이 마감된다는데 우린 비수기여서 쉽게 방을 잡을 수 있었다. 도회적 호화로움은 없이 매우 소박한 곳이지만 지금껏 내가 묵었던 호텔 중 최고의 반열에 올리고 싶다!




DSC_1603-922.jpg




     식사를 마친 후 두터운 패딩 점퍼로 무장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 밸리가 내려다보이는 호텔 주위 언덕을 산책하였다. 마침 오늘이 음력 1월 11일, 정월 대보름을 앞둔 밝은 달이 둥실 떠올라 계곡 전체를 환하게 비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르디 너른 밸리, 저 멀리 달빛을 받은 메사와 뷰트의 형상, 그 뒤 하늘엔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무수한 별... 그 고요하고 유현한 분위기는 언어로 표현 가능한 영역 밖에 있을 뿐이다.



DSC_1633-922.jpg

▲ 왼쪽 East Mitten Butte의 높이는 해발 1,898미터이고 오른쪽 West Mitten Butte는 1,882미터다.




DSC_1648-922.jpg

▲ 모뉴먼트 밸리의 밤. 투어에서 돌아오는 차량의 불빛이 보인다.




    반반의 가능성을 두고 생각해 왔던 한 가지를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모뉴먼트 밸리의 아이콘, 세 개의 미튼(Mitten)을 배경으로 별 궤적 사진에 도전해 보기로 한 것이다. 가족들을 객실에 들여보내 먼저 취침하라고 이르고, 카메라와 삼각대, 랜턴 등을 챙겨 나오려 하니 아버지를 혼자 야밤에 내 보내는 것이 걱정되었는지 아들녀석이 동행하겠다며 따라 나선다. 흠. 기특한 녀석 같으니라구.   

     차에 시동을 걸고 조용히 호텔 주차장을 빠져 나와 인적 없는 밸리지역으로 진입하였다. 세 개의 돌기둥, 미튼이 잘 보이는 지점 근처에 차를 세우고 가까운 언덕에 삼각대를 펼치고 카메라를 얹었다. 사실 나도 별 궤적 사진은 난생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미국으로 오기 전 별 궤적 사진 강좌를 인터넷에서 찾아 읽어 본 것이 전부이다. 강좌 내용을 기억하여 촬영 모드를 세팅하였다. 16-35mm 줌렌즈의 최대 광각, 조리개는 f/5.6, ISO는 640, 셔터스피드 30초, 30초마다 1초의 인터벌을 두고 2시간 30분 동안 연속 촬영.      

사실 오늘은 별 사진 찍기엔 그리 적합하지 않는 날이다. 중천에 뜬 달 때문이다. 달빛이 전혀 없는 그믐날이 최적이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다. 대신 구름이 거의 없는 청명한 하늘에, 주위에 인위적인 불빛으로 인한 광해(光害)가 없는 이런 환경만 해도 감지덕지가 아닌가. 더구나 여긴 다른 곳도 아닌 모뉴먼트 밸리란 말이다! 

     프레임에 달빛이 직접 들어오지 않게 렌즈 방향을 맞추고 구도를 대충 잡은 다음 인터벌 타이머의 릴리즈 버튼을 살포시 누른다. 30초 간격으로 끊는 경쾌한 셔터음이 고요한 계곡으로 울려퍼진다. 정확한 간격으로 울리는 이 셔터음 외엔 완벽한 정적의 세계다. 지금 시각 23:13분,촬영이 끝나면 1시 40분쯤 될 것이다. 매우 춥진 않았지만 밤공기가 제법 차가와져 우린 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운전석을 뒤로 확 제끼고 누워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틀었다. 공간 가득 울려퍼지는 첼로의 선율을 타고 검푸른 하늘을 유영하는 그 느낌은 소름이 돋을 만큼 좋다! 안느 가스티넬(Anne Gastinel)의 연주는 첼로 특유의 묵직하고 거친 톤이 아니라 투명한 느낌을 주면서 비단결 같이 야들야들 보드라운 음색이다. 지금 이 밤, 이 순간의 분위기와 이보다 더 잘 맞을 순 없다!


Startrails.DXO_922-2.jpg

 ▲ 달빛이 없었다면 세 배 이상의 별 궤적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약 한시간이 흘렀을까, 잠들 줄 알고 있었던 아들 녀석이 조용히 입을 열어 객실에 있을 어머니와 여동생을 걱정한다. 그렇긴 하다. 잠시 철수를 결정하고 혼자 열심히 작업 중인 카메라를 내버려 두고 조용히 차를 움직여 객실로 되돌아 왔다. 그 새 누군가가 카메라를 거두어가리라는 걱정은 전혀 들지 않았다. 모녀는 혼곤한 잠에 빠져 우리가 들어온 줄도 모른다. 아들에게도 취침하라고 해 놓고 나도 일단 눈을 좀 붙였다. 문득 눈을 떠 시계를 확인하니 두 시가 약간 넘었다. 거의 한 시간 반을 잔 것같다. 객실을 살며시 빠져나와 현장으로 가 보니 이미 촬영이 끝나 있다.  

     카메라를 회수하여 객실로 되돌아 와서 눈을 붙이려 하니 좀체 잠이 오질 않는다. 피곤한 느낌도 없다. 잘 됐다. 이번엔 발코니샷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발코니로 나가 다시 카메라를 세팅하고 다시 인터벌 타이머를 세팅하여 릴리즈 버튼을 눌러 놓고 다시 잠을 청하였다.



BalconyShot_922-2.JPG

▲ 객실 발코니에서 찍어 본 별 궤적.




(8일차 끝)


댓글은 로그인 후 열람 가능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공지 2024년 요세미티(Yosemite) 국립공원 입장 예약 필수 [2] 아이리스 2023.12.23 2543 0
공지 2주 정도 로드 트립 준비중입니다. 어떻게 식사를 해결해야 할 지 고민중입니다. [16] 쌍둥이파파 2023.01.17 6605 1
공지 미국 국립공원 입장료, 국립공원 연간패스 정보 [4] 아이리스 2018.04.18 215966 2
공지 여행계획시 구글맵(Google Maps) 활용하기 [29] 아이리스 2016.12.02 631119 4
공지 ㄴㄱㄴㅅ님 여행에 대한 조언 : 미국여행에 대한 전반적인 준비사항들 [39] 아이리스 2016.07.06 818404 5
공지 goldenbell님의 75일간 미국 여행 지도 [15] 아이리스 2016.02.16 676395 2
공지 렌트카 제휴에 대한 공지입니다 [7] 아이리스 2015.01.31 675638 1
공지 공지사항 모음입니다. 처음 오신 분은 읽어보세요 [1] 아이리스 2014.05.23 728560 2
7985 미국 서부 7박 8일 일정 문의드립니다.(7월말 8월초) [4] 정우아빠 2017.03.12 1757 0
7984 10월 약 2주간 5인 가족 미서부 여행 문의 [2] 김똑띠 2017.03.12 1575 0
7983 going to the sun road open [1] 마산의 2017.03.11 1514 0
7982 7월 중순 2주 정도 미동부 와 캐나다 여행 계획입니다 [4] 제름스 2017.03.10 2133 0
7981 자동차 보험 대인대물 TP와 SLI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2] 맨발이 2017.03.10 2422 0
7980 4월말 5월초 여행 일정 검토 요청드립니다. [9] file 맨발이 2017.03.09 1561 0
7979 LA공항에서 EUROPCAR 렌트하는 방법 문의 [2] 맨발이 2017.03.09 3637 0
7978 미국 서부 자동차 여행 12박 13일 여행일정 조언 부탁드립니다. [4] kimgery 2017.03.07 4600 0
7977 그랜드써클 일출/일몰시간 확인할 곳 좀 알려주세요 [2] 송촌동목장갑 2017.03.07 3141 0
7976 rent car 문의 [2] 마산의 2017.03.07 1793 0
7975 2017년 3월 그랜드 써클, 요세미티 일정 재문의드립니다. [10] 석야 2017.03.07 1950 0
7974 그랜드캐년 1박 2일 투어 일정 문의 드립니다. [1] akaDC 2017.03.07 1725 0
7973 올해 10월초 미서부 일정문의합니다!! [4] 숀숀 2017.03.06 2173 0
7972 9월 미서부 및 로키국립공원 여행 계획 (수정) [16] file 막켄나의 황금 2017.03.06 1916 0
7971 안녕하세요. 4월말~5월초 미서부 로드트립 일정 확인부탁드립니다. [2] anna 2017.03.06 2165 0
7970 2017-2018년 캘리포니아 1번 해안도로 공사정보 [12] file 아이리스 2017.03.06 382746 1
7969 올 여름 2주간 캐나다록키와 옐로스톤 일정입니다. 질문드립니다. [6] 존킴 2017.03.06 2010 0
7968 5월 초 서부 국립공원 여행 일정 문의입니다~!! [6] file F4U 2017.03.06 1856 0
7967 yellowston [8] daum 2017.03.06 2271 0
7966 4월 봄방학 기간 그랜드캐년 일정입니다. 한번 봐주세요~ [8] 오순 2017.03.06 1875 0
7965 미국 서부 가족 로드트립 일정 최종수정 및 질문 [6] kama 2017.03.06 2128 0
7964 요세미티-옐로스톤-덴버-그랜드서클RV 일정입니다 [2] 인생직진 2017.03.05 2057 0
7963 5월말 그랜드 써클 5박6일 일정 문의 [3] JKim 2017.03.04 1694 0
7962 미국 유료도로 및 패스 구입 문의드립니다. [3] 둘현맘 2017.03.04 3527 0
7961 항공권 문의드립니다. [2] 마준김 2017.03.04 1632 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