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두 달 여행기를 올립니다. 이 곳에서 도움을 많이 받은 맘에 무언가 갚아야 겠다는 생각입니다. 여행지에서 바로 올리면 지금 가시는 분들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좀 길지만 따로따로 올리겠습니다. 사진은 올리지 않겠습니다. 사진까지 보려면 제 블로그를 참조해 주세요.


블로그 주소 = https://blog.naver.com/jkahn98


2022년 5월 27일

그랜드캐년은 비현실적이다. 포인트(전망대)에서 보는 광경은 너무나 압도적인데, 한참을 봐도 이것이 진짜인 지 잘 모르겠다. 18년 전 전망대에서 그랜드캐년을 봤을 때 그랬다. 전망대 몇 곳만 돌아본 뒤 다소 허망해 하며 돌아갔다. 나는 그 때 그랜드캐년 밑으로 내려가 보지 못 한 것을 후회했다. 수박 겉핥기 하듯 지켜 보기만 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18년이 지나 다시 왔을 때, 나는 밑으로 내려가 그랜드캐년의 진면목을 만났다.

그랜드캐년 이틀째. 우리는 그랜드캐년 밑으로 내려가기 위해 사우스 카이밥 트레일헤드(South Kaibab Trailhead)로 갔다. 숙소인 마스윅 롯지(Maswik Lodge)에서 셔틀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랜드캐년 내 셔틀버스는 노선이 4개가 있다. 우리는 블루라인을 탄 뒤 방문자 센터에서 오렌지 라인으로 갈아타야 했다. 숙소 바로 앞에 유명한 트레일인 브라이튼 앤젤 트레일헤드(Bright Angel Trailhead)가 있었지만, 사우스 카이밥 쪽의 풍광이 더 좋다는 말에 그리로 향했다.

오전 9시. 드디어 시작됐다. 트레일은 아찔했다. 천 길 낭떠러지에 '갈지자' 길이 나 있었다. 내리막 길이고 경사도 비교적 완만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조금 지나니 길은 금세 만만해졌다. 사람은 환경에 정말 빠르게 적응한다. 한 시간여 만에 시더릿지(Cedar Ridge)까지 내려갔다. 왕복으로 2-4시간 걸린다고 안내 책자에 있던 곳이다. 여기서 더 갈 지 가족들과 상의했다. 당초 나의 목적지는 조금 더 가야하는 스켈레톤 포인트(Skeleton Point)였다. 왕복 4-6시간 거리의 트레일이다. 막내 시윤이는 "더 가겠다"고 했고, 첫째 윤하는 "돌아가자"고 답했다. 타협해서 30분 정도만 더 내려가자고 했다.

사우스 카이밥 트레일헤드 초반에는 '갈지자' 모양의 아찔한 길이 이어진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인저를 만났다. 나는 아이들과 더 내려가는 것이 무리되는 것은 아닌지 물었다. 레인저는 "한여름에 아이들과 가는 것을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날은 폭염 주의보가 내려져 있었고, 한 낮에 32도까지 오른다는 예보가 있었다. 발걸음을 곧바로 돌렸다. 전문가가 하는 말에 고민이 사라졌다. 우리는 부지런히 왔던 길을 다시 올랐다. 생각보다 가팔르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오르는 길은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다. 중간에 사진 찍고 쉬었던 30분을 더해도 세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전날 세도나의 악마의 다리 트레일에서 너무 고생해서인지, 쉽게 느껴졌다. 기온도 27-28도 수준에 그쳤다. 아이들은 "오후에 트레일 한 곳을 더 가자"고 할 정도로 힘이 남았다.

숙소에 돌아온 뒤 조금 쉬었다가 오후 4시께 다시 나갔다. 둘레길 같은 평지인 사우스 림 트레일(South Rim Trail)을 쉬엄쉬엄 갔다. 사진 찍기 좋았다. 가는 길에 유명 포인트들이 있었다. 나는 야바파이 포인트(Yavapai Point)가 가장 좋았다. 이 곳에선 멀리 콜로라도 강과 브라이트 앤젤 협곡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크게 붐비지 않아 사진 찍기도 좋았다. 트레일을 걷다 보면 그랜드캐년이 어떻게 형성 됐는 지 다양하게 알려주는 자료들이 있다. 윤하는 특히 그랜드캐년이 시간대 별로 형성된 설명을 좋아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이 다 나온다며 신났다. 그랜드캐년은 20억년 전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지구의 나이(약 46억년)의 절반 가까이에 해당한다. 그랜드캐년 지층 별로 나이는 다 다랐다. 그 다른 나이에 해당하는 돌 샘플이 죽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그 돌덩이에 큰 감흥을 받지 못 했지만, 윤하가 신나자 덩달이 신이 났다.

나는 윤하의 호기심이 부럽다. 나는 어렸을 때 호기심이 적었다. 18년 전 미국에 일 년 간 머물렀을 때도 가본 곳이 드물었다. 지금보다 시간도, 돈도, 여유도 더 있었을 때다. 왜 그렇게 아무것도 안 했는지 신기할 정도다. 윤하는 돌맹이, 나무, 식물, 동물 등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을 좋아한다. 기자 일을 하면서 나는 다양한 선후배를 많이 봤는데, 기자로서 가장 큰 자질이 호기심이란 것을 느꼈다. 호기심이 없으면 궁금증이 없고 글을 써도 평평한 것이 된다. 나는 처음 기자일을 할 때 부족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 식으로 동기부여를 하곤 했다. 그것은 뻣뻣한 자존감 따위였다. 내가 쓴 기사를 누군가 알아봐 주는 것으로 만족하곤 했다. 나는 미국에 와서 나와 가족을 위해서만 글을 쓰기로 했다.

하루에 두 개의 트레일을 한 뒤 몸은 녹초가 됐고 마음은 부자가 됐다. 나는 여행에서 '속도'가 너무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천천히 갈수록 보는 것이 많고 느끼는 것도 크다. 그런 의미에서 비행기 보다는 자동차가, 자동차 보다는 자전거가, 자전거 보다는 걷는 게 좋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이 너무나 잘 따라와 주는 것, 아니 나보다 더 신나 해줘서 고맙다. 내일은 예정에 없었던 브라이트 앤젤 트레일을 아침 일찍 하기로 했다. 미국 일주 여행이 점점 '트레일 여행'이 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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