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1: 2023년 9월 23일 토요일

새벽 4시 정도에 밤새도록 내리던 빗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다행히 텐트는 떨어지는 빗물을 잘 막아주고 있었고 텐트 내부도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일어나서 몸 상태를 대충 살펴보니 어디 특별히 쑤시거나 아픈데 없이 생각보다 거뜬했습니다. 이미 3주 동안 여기 저기 마구 걸어 다녀서 그런지 몸은 저도 모르게 이런 장거리 하이킹에 완벽하게 적응되어 있었습니다. 인터넷 자료를 보면 미국인들은 Rim to Rim 하이킹을 위해서 3개월 심지어 6개월 전부터 운동을 하면서 체력을 키운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 그건 좀 오버인 것 같습니다. 1박 2일 일정으로 Rim to Rim 하이킹을 할 경우 1달 정도 부지런히 걸어 다니면서 체력을 일정 수준으로만 유지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만 1박 2일 일정이 아닌 하루에 Rim to Rim 하이킹을 끝내고자 한다면 그건 좀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어제 저녁 8시만 해도 Bright Angel Campground가 꽤 더워서 침낭을 덮을 필요가 없을 정도였는데 잠들 무렵인 10시가 넘어가자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면서 침낭 속으로 쏙 들어가 잠을 자야만 했습니다. 낮에는 뜨겁게 달궈졌다가 밤이 되면 확 식어버리는 전형적인 사막 기후 날씨입니다.

제가 예약한 Phantom Ranch 조식 시간이 오전 6시 30분인지라 10분 전에 텐트에서 나와 Phantom Ranch로 슬슬 이동합니다. 조식 시간은 오전 5시와 6시 30분 가운데 선택이 가능합니다. 대낮의 햇빛을 조금이라도 피하고자 하는 분들은 오전 5시 식사 후 해가 뜨기도 전에 하이킹을 시작하며 나중에 햇빛을 왕창 맞더라도 아침에 조금 더 자야겠다는 분들은 6시 30분 식사를 하면 됩니다. 둘 다 메뉴는 똑같습니다.

어제 아이폰 배터리 문제로 인해 그냥 건너 뛰었던 Phantom Ranch 주변 사진들을 찍으면서 이동합니다. Campground가 Bright Angel Creek 안쪽에 있기 때문에 다리를 하나 건너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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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위에서 본 Bright Angel Campground 모습입니다. 제 사이트가 다리 건너 왼편 첫 번째인지라 다리 위에서 저의 어제 숙소였던 노란 텐트도 예쁘게 잘 보이고 그 옆에 빨간 방수포를 씌어 놓은 배낭도 기둥에 대롱대롱 잘 매달려 있습니다. 배낭을 땅바닥에 놓고 잘 경우 밤새 (다람)쥐들이 와서 다 갉아먹습니다. 보시다시피 사이트 바로 옆에 Creek이 흐르는지라 준비해 온 슬리퍼 신고 내려가서 발 씻고 세수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인터넷에 있는 사진들을 보면 Creek 물이 흙탕물인 경우도 꽤 있는데 제가 갔을 때는 정말 맑은 시냇물이었습니다. 어제 이야기 드린 바와 같이 Campground를 50%만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제 옆 사이트는 텅 비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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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ntom Ranch 올라가는 길에 위치한 마구간에는 오늘 일정을 준비하고 있는 노새들이 출발 준비를 벌써 끝마치고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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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teen 건물 안 따뜻한 노란 전구 불빛이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와 묘하게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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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식사와 마찬가지로 아침 식사 역시 오는 순서대로 종업원이 안내해 주는 자리에 앉으면 됩니다. Scrambled Egg, Pancake 그리고 베이컨이 주 메뉴이고 제게는 가장 중요한 모닝 커피가 무제한 제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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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모서리에 놓여 있는 어댑터는 아이폰을 아침 식사 시간에 추가로 충전하기 위해 제가 가져온 것인데 다행히 주방장님 핸드폰이 아이폰인지라 케이블을 빌려서 충전을 할 수 있었으며 식사가 끝날 무렵 80% 수준까지 충전이 되었습니다. 이 정도 배터리 용량이면 올라가는 길에 선별해서 예쁜 사진을 찍으면 어제처럼 하이킹 중간에 아이폰이 방전되는 불상사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식당에서 30년 넘게 근무하셨다는 할아버지께서 오늘 여기까지 온 사람들은 매년 Grand Canyon NP를 방문하는 7백만 명 가운데 1%에 속하는 사람들이니 자부심을 가지라고 기를 팍팍 세워주셨고 거기에 덧붙여 기나긴 하이킹을 통해 Grand Canyon을 오늘 어떻게든 탈출(?)해야 하는 저희들을 위해 따뜻한 격려의 말씀 또한 해 주셨는데 그 문구가 너무 좋아서 여기에 한 번 옮겨봅니다.

Many people may feel nervous for hiking out today but do not worry. It was your body which took you down to this very bottom of grand canyon. Now your mind will get you out of this canyon today.

원래 남들이 하는 말에 시큰둥한 편인데 할아버지가 해 주신 이 말씀은 제 마음 깊은 곳까지 전달되는 굉장히 큰 울림이 있었고 저도 모르게 살짝 눈물이 났습니다.

오전 7시에 아침 식사를 끝내고 다시 Campground로 되돌아가는데 오늘 올라가야 할 South Rim의 끝이 살짝 보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 참으로 멀구나...'라는 탄식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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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를 개고 나니 어제 비에 젖지 않은 텐트 자리가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갑자기 '내가 죽고 나면 결국 저만한 땅 크기에 묻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기분이 괜히 센티해졌습니다. 여행 하면서 개똥 철학 비스무리한 생각은 진짜 안 하는데 Grand Canyon 바닥에서 하루 자서 그런지 아니면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씨라 그런지 아침에 제가 좀 이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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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최대한 후회 없이 잘 먹고 잘 살자!'라고 씩씩하게 마음을 다 잡아 먹고 오전 8시에 하이킹을 출발합니다. 사이트 깔끔하게 정리하고 식수대에 가서 양치 및 세수하고 배낭을 다시 꾸리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지만 오늘은 Bright Angel Trail 올라가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굉장히 여유롭게 일정을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날씨는 Heavy Cloud but No Rain 상태였는데 사실 Bright Angel Trail 하이킹을 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날씨는 없습니다.

Creek 건너편을 보니 노새를 타고 움직이는 분들은 카우보이 인솔하에 벌써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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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길에 바라본 Campground입니다. 다들 짐 챙기느라 바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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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바닥에 묻혀 있는 파이프라인입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파이프라인 곳곳이 외부로 노출되어 있으며 그에 따라 파이프라인 파열이 자주 발생합니다. 어제 The Box 구역을 내려올 때도 바닥의 파이프라인에 큰 파열이 발생해서 아까운 물이 줄줄 새고 있었습니다. 이 파이프라인은 Silver Bridge 하단을 통해 Colorado River를 건너간 후 Havasupai Gardens 및 South Rim 전체에 물을 공급해 주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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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ght Angel Trail과 South Kaibab Trail의 갈림길입니다. 사실 길 자체만 놓고 보면 South Kaibab Trail을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편이지만 식수 문제 해결 및 완만한 경사도로 인해 Bright Angel Trail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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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ght Angel Creek을 마지막으로 건너는 다리를 통과한 후 Silver Bridge를 향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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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ver Bridge(정식 명칭은 Bright Angel Trail Bridge)를 건너서 North Rim 방향을 보니 Zoroaster Temple의 웅장한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Phantom Ranch에서 출발하는 Clear Creek Trail 하이킹을 통해 저 꼭대기를 올라가는 독한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곳은 아니고 전문 산악인들이 레펠을 이용해서 올라가는데 Permit을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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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옆의 길은 모래 사장이라 발이 푹푹 빠지는데 이 지점에서 다시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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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끼고 가는 길목에서 노새 무리를 만났는데 제가 Phantom Ranch에서 먹었던 식사에 쓰인 모든 식자재는 노새들이 이렇게 고생스럽게 날라주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예전에 노새 무리를 봤을 때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오늘은 이 노새들이 너무나 고맙습니다. 카우보이 한 명과 카우걸 한 명이 각각의 무리들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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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기슭의 길을 지나 남쪽으로 방향을 틀면 Pipe Creek Rest House에 도착합니다. 도착 시간은 오전 8시 47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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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는 길에 조금씩 내리던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습니다. 귀찮기는 했지만 배낭 보호를 위해 방수포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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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North Rim에서 지나쳤던 Vishnu Schist 바위 암벽이 모두 빗물에 젖어 있고 하늘에도 먹구름이 잔뜩 껴서 그런지 더욱 더 시커멓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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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vil's Corkscrew(악마의 나선형 계단)라고 불리는 Switchbacks 구간을 통과한 후 North Rim 방향을 바라보니 경치가 아주 장관입니다. 2019년에 이 길을 올라올 때는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날이었는데 오늘은 구름이 잔뜩 껴서 그런지 같은 경치인데 너무나 다른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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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vil's Corkscrew를 옆으로 내려다 보면서 계속 올라가던 중 마침 하이커 한 분이 계셔서 사진 한 장을 찍었습니다. 2019년도 Bright Angel Trail 하이킹을 하던 당시에 오르막 길이 너무 힘들어서 하이킹 중간에 제가 들어간 사진을 한 장도 못 찍었는데 오늘 소원풀이 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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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제법 내렸기 때문에 길 중간에 자그마한 웅덩이가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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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면서 2023년 사진들을 정리해 보니 2019년도에 비해서 좋은 장소에서 Bright Angel Trail 사진들을 훨씬 많이 찍었습니다. 2019년도 하이킹은 올라오는 길이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사진 찍을 정신적 여유가 없었는데 1박 2일 일정으로 움직이는 오늘은 이전 대비 (1)체력도 훨씬 짱짱하고 (2)시간적 여유도 많고 (3)한 번 걸어봤던 길이기 때문에 이미 친숙하기도 하고 (4)무엇보다도 비가 적당히 오는 날씨인지라 Bright Angel Trail을 올라가는 하이킹이 마냥 즐겁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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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Pipe Creek을 따라 진행되던 Bright Angel Trail은 The Devil's Corkscrew를 지난 후 길의 방향이 거의 180도 가까이 한 번 크게 꺽인 후에 Garden Creek를 따라 길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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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이 Bright Angel Trail이 Garden Creek과 처음으로 만나는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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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Creek과 길이 교차되는 지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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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vasupai Gardens로 올라가는 길목에 노새를 타고 내려오는 관광객이 지나갑니다. 길에서 통행 관련 노새가 무조건 우선권이 있으므로 길 옆에 서서 노새가 지나갈 때까지 하이커들은 기다려야 합니다. 노새가 지나간 다음 North Rim 방향을 보니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Zoroaster Temple 및 Brahma Temple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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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컵케이크처럼 생긴 바위 절벽 사이로 길을 걷다 보니 갑자기 조그만 폭포가 하나 눈에 쑥 들어옵니다. Garden Creek Waterfall인데 2019년 하이킹 당시에는 이 폭포를 보거나 지나친 기억조차 없습니다. 아마도 너무 힘들어서 멋모르고 지나쳤거나 아니면 수량이 적어서 폭포 물길이 없었거나 둘 중의 하나(Creek이 일년 내내 마르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전자였을 것임)였을 것인데 오늘처럼 비가 내린 날에는 폭포의 수량이 제법 되기 때문에 놓칠래야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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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를 지나 South Rim의 무시무시한 절벽을 보면서 계속 Havasupai Gardens로 걸어 올라갑니다. 2019년도에 이곳을 지날 때 느꼈던 무시무시한 위압감은 온데 간데 없이 그냥 South Rim의 이런 모습이 너무나 정겹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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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38분에 Havasupai Gardens에 위치한 Pumphouse를 지나갑니다. North Rim에 위치한 Roaring Springs에서 발원된 물은 고도 차이를 이용한 중력의 힘으로 파이프라인을 통해 Havasupai Gardens까지 일차 전달된 후 이곳에 위치한 Pumphouse에서 한 번 더 South Rim 꼭대기까지 물을 밀어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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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Grand Canyon NP에서는 관개시설  개선을 위한 대규모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아래 자료를 보시면 얼마나 많은 내용의 공사가 이뤄지고 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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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vasupai Campground입니다. Indian Garden으로 기억하고 계신 분들이 훨씬 더 많을 것 같은데 최근에 이름이 변경되었습니다. 원래 이곳에 살고 있다가 나중에 백인들에 의해서 추방당한 Havasupai Indian을 기리기 위해 미국 정부에서 이름을 변경하였습니다. Bright Angel Campground 출발 기준으로 8.1 km 떨어져 있고 고도 변화는 오르막 400 m 정도인데 2시간 38분만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Bright Angel Trailhead까지 남은 거리가 7.2 km이고 올라가는 고도 변화가 925 m인데 예약해 놓은 Bright Angel Lodge의 Check-In 시작이 오후 4시이기 때문에 걷는 속도를 상당히 늦출 필요가 있었습니다. 지금 페이스대로 올라가면 오후 3시 안에 올라갈 것이 뻔한데 Check-In이 바로 안 될 경우 오랜 시간을 밖에서 그냥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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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에서 물도 보충하고 좀 여유롭게 오가는 사람들도 구경하면서 앉아 있었습니다. 여기서 왕복 5 km 거리에 있는 Plateau Point라는 곳을 별도로 다녀올 수 있는데 오늘 날씨도 그렇고 해서 그냥 패스하기로 했습니다. 어제랑 오늘 걸어 보니 다음에 1박 2일 일정으로 Rim to Rim 하이킹을 만약 한 번 더 할 수 있다면 Ribbon Falls와 Plateau Point 모두 다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30분 가량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오전 11시 13분에 다시금 길을 올라갑니다. 슬슬 협곡 내부로 몰려들던 먹구름은 이제 Grand Canyon 전체를 삼킬 듯한 기세로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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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는 길 중간에 뒤로 쫙 펼쳐지는 North Rim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더 남깁니다. 사진 속에서 희희낙락거리는 제 얼굴 표정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날 하이킹은 정말 힘들다는 생각이 일도 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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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쪽 시뻘건 절벽(North Kaibab Trail에서 지나친 Redwall Limestone과 동일한 지층으로 보임) 아래 및 길 옆으로 노란 야생화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구간을 꽤 오랜 시간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이제는 North Rim이 비구름에 잠겨서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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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눈을 들어 앞을 보니 Switchbacks 상단에 파란색 우비를 입은 두 명의 하이커가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3-Mile Resthouse에 도착하기 전 올라가야 하는 Jacob's Ladder라고 불리는 이단 Switchbacks 구간이 눈 앞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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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차 Switchbacks 구간을 슥슥 치고 올라가니 이차 Switchbacks 구간을 올라가는 하이커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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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 Switchbacks 구간 역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올라가니 3-Mile Resthouse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전 2019년도에는 Havasupai Gardens에서 3-Mile Resthouse까지 올라가는 구간이 가장 힘들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힘들기는커녕 걷는 내내 콧노래를 부르면서 올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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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시 16분에 3-Mile Rest House에 도착했습니다. Havasupai Gardens 출발 기준으로 2.4 km 거리에 오르막 고도 변화가 280 m입니다. 도착해서 Resthouse 뒤편으로 가 눈 앞에 어마어마한 규모로 펼쳐지는 South Rim 붉은 절벽을 보는데 South Rim 상단이 비구름으로 덮여 있어서 그런지 아주 신비로운 분위기가 정말 끝내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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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도착해서 미리 준비해 온 발열 식량으로 오늘 점심을 먹었습니다. 점심 메뉴가 라면 & 밥인지라 Resthouse 안에서 먹으면 냄새로 인해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 것 같아서 Resthouse 뒤편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눈앞의 붉은 절벽을 배경 삼아 먹었는데 살포시 내리는 비를 맞으며 먹는 라면 & 밥의 맛은 최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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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서부 여행을 하면서 서너번 발열 식량으로 점심을 해결했는데 그동안 하이킹을 했던 장소가 굉장히 외져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에서 혼자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처음으로 사람이 많은 곳에서 발열 식량을 해 먹었는데 요리 과정을 지켜보던 주변 미국 분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그냥 평범해 보이는 비닐 봉지에 찬물을 부었을 뿐인데 10초도 지나지 않아 봉지 밖으로 김이 펄펄 나면서 물이 끓어대니 주변 많은 분들이 마치 매직쇼를 보듯이 이 광경을 구경하셨습니다. 옆에 계신 할아버지 한 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Did you just boil the water here? How?'라고 단박에 여쭤 보셔서 원리를 설명해 드렸더니 도대체 이런 신박한 제품을 어디서 구했냐고 또 여쭤보셨습니다. 이거 한국에서 직접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답변 드렸더니 미국에는 왜 이런 제품이 없냐면서 한탄하셨습니다(잘 찾아보면 있지 않을까요?). 옆에 있던 남자 꼬마도 이 광경이 신기한지 어머니와 함께 요리되고 있는 봉지를 이리저리 유심히 관찰하다가 갔습니다.

이곳에서 식사를 마칠 무렵 Steve & Francis 부부를 만났습니다. 우연히 3-Mile Resthouse에서 출발(오후 1시 15분 출발)할 때 같이 출발하게 되었는데 South Rim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길 내내 함께 걸었습니다. 머나먼 Texas에서 온 부부였는데 두 분 모두 체력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라 걷는 내내 제가 뒤에서 으쌰으쌰 하면서 밀고 올라갔습니다. Francis가 아이폰 충전 케이블을 가지고 있어서 이 지점부터 올라가는 내내 다시금 아이폰 배터리를 100% 충천할 수 있었던 것도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3-Mile Resthouse를 뒤로 하고 슬슬 South Rim 꼭대기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1.5-Mile Resthouse로 갑니다. 두 Resthouse간 거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정확히 2.4 km(1.5 mile)이고 고도 차이는 305 m이니 작은 산을 하나 올라가는 기분으로 걸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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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절벽을 오르는 길이라서 끊임없는 Switchbacks를 타고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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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ght Angel Trail을 걷는 도중에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날씨가 좋아지면서 파란 하늘도 살짝 드러나고 North Rim에 조금이나마 햇빛이 들어오면서 Canyon에 음양의 조화가 확 이뤄졌습니다. Bright Angel Canyon을 중심으로 좌우에 놓여 있는 주요 Peak들을 한눈에 다 볼 수 있었는데 1번이 Buddha Temple, 2번이 Brahma Temple, 3번이 Zoroaster Temple입니다. 1번 왼쪽 끝에 Cheops Pyramid(4번)가 있는데 South Rim에 가려져서 끝만 살짝 보이는 점이 좀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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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는 도중에 갑자기 Bighorn Sheep 두 마리가 절벽을 타고 쏜살같이 사람들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나름 재빠르게 아이폰을 뽑아 사진을 찍었는데 Bighorn Sheep가 너무나 빨리 움직이는 바람에 Bighorn Sheep의 엉덩이만 찍힌 아래 사진 한 장만 건질 수 있었습니다...... 길을 걷던 모든 사람들이 여간해선 보기 힘든 Bighorn Sheep를 바로 눈 앞에서 보면서 다들 너무나 즐거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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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Mile Resthouse를 오후 2시 42분에 통과했는데 이 무렵부터 Grand Canyon 내부로 시커먼 비구름이 몰려들면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비는 폭우로 돌변했습니다. 길 바닥에는 폭우로 인해 작은 실개천처럼 물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잘 보이던 North Rim은 짙은 구름으로 인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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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통과한 1.5-Mile Resthouse 기준으로 South Rim 정상까지는 이제 340 m만 올라가면 되는데 Steve와 Francis는 둘 다 많이 지쳐서인지 본인들 몸 속에 남아 있는 체력의 끝을 붙잡고 최후의 2.4 km를 꾸역꾸역 올라갑니다. 하지만 저는 이 멋진 Bright Angel Trail 하이킹이 그리고 이번 미국 서부 여행이 불과 2.4 km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발걸음이 정말 엄청나게 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 체력이 고갈되는 이 지점에 이르러서도 오늘 저의 체력은 말도 못하게 짱짱했고 남아 있는 길이 2.4 km가 아니라 24 km였어도 팍팍 걸어갈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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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18분에 Lower Tunnel을 통과합니다. 이 지점부터 정상까지는 거리 1.4 km이고 180 m만 올라가면 됩니다. 잠시나마 비를 피하고자 많은 사람들이 터널 부근에 모여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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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wer Tunnel을 지나니 드디어 South Rim의 꼭대기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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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per Tunnel로 올라가는 계단식 길이 계속 퍼붓는 비로 인해 질퍽한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이 비는 정말 South Rim 정상까지 올라가는 내내 쉬지 않고 줄기차게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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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per Tunnel 도착하기 전에 뒤로 돌아 마지막으로 오늘 걸어 올라온 Bright Angel Trail의 전경을 담아봅니다. North Rim을 완전히 뒤덮어 버린 비구름이 다행히도 Bright Angel Trail까지 집어삼키지는 않아서 꽤 괜찮은 사진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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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per Tunnel를 오후 4시에 정확하게 통과합니다. 이 지점에 이르러 비를 쫄딱 맞고 나니 정신줄이 살짝 풀려서 다들 실실 웃고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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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ght Angel Trailhead에 오후 4시 4분에 도착했습니다. Bright Angel Lodge Check-In 개시 시간이 오후 4시이니 아주 칼같이 시간 맞춰서 도착한 셈입니다. 오늘 길 후반부를 함께 걸어온 Steve & Francis 부부와 Trailhead 안내판 앞에서 Rim to Rim 하이킹 완주 기념 사진을 남겼습니다. 2019년도에는 하이킹 완주하고 나서도 Trailhead 안내판 앞에서 사진 한 장 제대로 못 찍었는데(그림자 사진만 찍었음) 그 아쉬움 역시 이번에 모두 해소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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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퍼붓던 비는 Bright Angel Trailhead에 도착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그쳤고 비구름도 순식간에 거치면서 구름 속에 파묻혀 있던 Grand Canyon이 다시금 그 멋진 위용을 드러내 주었습니다. 사진 한 가운데 절벽 끝으로 향하는 희미한 Plateau Point Trail을 보면서 '반드시 이 멋진 길을 꼭 다시 오리라'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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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ve & Francis 부부와 정식 작별 인사를 하기 직전 구름이 넘실대는 Grand Canyon을 배경으로 Steve가 멋진 사진을 한 장 찍어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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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작별을 뒤로 하고 Bright Angel Lodge에 오후 4시 21분에 도착했는데 하늘이 확 개기 시작하면서 오늘 처음으로 햇빛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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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ll Lodge에 있는 객실로 이동, 무거운 배낭을 풀어헤친 후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는데 몸이 그냥 사르르 녹아 내리는 느낌이었습니다. Bright Angel Lodge의 경우 욕조가 비치되어 있으며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푹 담그니 피로가 싹 씻겨 내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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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넘게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석양을 보기 위해 바깥으로 나와 보니 Grand Canyon은 지금까지 제게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금까지 제가 South Rim에서 봐 왔던 Grand Canyon 석양 가운데 오늘 이 모습이 제게는 넘버원입니다. 파란 하늘에 걸쳐 있는 멋진 구름들, 석양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North Rim과 그 반대편의 검은 그림자 그리고 Canyon 안에서 춤추고 있는 뭉게구름의 조화는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한 폭의 완벽한 그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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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m Trail의 일부를 천천히 걸으면서 조금씩 변해 가는 Grand Canyon이 석양을 마음껏 즐겼습니다. 황금빛 석양은 시간이 지나면서 불타는 노을로 변했고 일몰 예정 시간인 저녁 6시 20분이 되자 태양은 Grand Canyon 뒤로 자취를 감추면서 Grand Canyon에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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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를 위해 Lodge에 있는 Harvey House Cafe로 가서 Burger Set를 먹었습니다. 예전에 Lendon이 Fisher Towers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저도 오늘은 하이킹 완주 기념 및 여행 마무리 기념으로 Victory Beer 한 잔을 시켜 버거와 같이 맛있게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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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와 젖은 가방, 캠핑 장비 및 옷들을 방 곳곳에 펼쳐 말리면서 어제와 오늘을 곰곰이 돌이켜 보는데 불과 몇 시간 전에 끝난 하이킹이었지만 마치 오래전에 한 편의 기나긴 꿈을 꾸었던 것처럼 기억들이 벌써 아스라이 떠오릅니다. 이번 여행에서 Canyonlands NP에서 걸었던 Confluence Overlook Trail과 더불어 하이킹 이후 제게 커다란 성취감을 선사한 또 다른 하이킹으로 기억에 남을 Rim to Rim 하이킹을 실제로 걸어보니 단연코 미국 서부 하이킹의 끝판왕이자 저의 이번 3주에 걸친 미국 서부 여행의 대미(그렇기 때문에 저는 미국 서부 Grand Circle 여행을 할 때 Grand Canyon NP가 첫 번째 장소가 아닌 마지막 장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를 장식하기에 손색이 없는 하이킹이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미국 서부 여행 어디까지 해봤어?'라고 물어보면 이제는 "Grand Canyon NP에서 Rim to Rim 하이킹 했습니다"라고 으쓱대며 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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