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주요 일정은 그랜드 캐니언 사우스 림(South Rim)의 서쪽편을 탐방하는 것이다. 허밋 로드(Hermit Rd)를 따라 두루 돌면서 주변의 각 포인트별 경관을 두루 섭렵하고 저녁엔 호피 포인트(Hopi Pt)에서 일몰을 감상한 후 공원 남문과 가까운 윌리엄스의 발레(Valle) 지역에 위치한 숙소에서 하루를 묵을 계획이 예정되어 있다. 총 이동거리는 220마일(354km), 이동시간은 4시간에 불과하여 모처럼 여정이 가볍다. 시간의 압박이 적으니 그간 부족했던 잠을 보충하도록 늦잠을 허하였다. 미국에 온 지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으니 이제 시차에 적응하였는지 곧잘 잔다.
새벽형 인간인 나 혼자 일찍 잠에서 깨었다. 가족들이 아직 잠에 취해 있는 동안 바깥으로 나가 날씨 점검 겸 별반 볼 것이 없는 숙소 일대를 한바퀴 산책해 보았다. 하늘은 쾌청하고 온도는 서늘하여 괜히 기분이 업된다. 잠시 후면 그랜드 캐니언을 만난다는 설레임 때문일까?
음식이 떨어지기 전에 식사 꺼리를 챙기러 프런트로 가 보았다. 리셉션의 테이블엔 백인 노인 대여섯 분이 빵과 커피를 앞에 두고 정담을 나누고 계셨다. 가볍게 인사 말씀을 드리니 반갑게 응대해 주시면서 어디서 왔느냐, 언제 왔느냐? 코리아 중 사우스냐 노스냐 질문 공세가 이어졌고, 나도 장난기를 좀 섞어 "물론 노스"라고 응수해 드리자 모두 깜놀하신다. "물론 농담"이라 말씀드리고 서로 한참 웃었다. 어줍잖은 영어지만 그 분들과 잠시 나누는 대화는 즐겁다. 다들 오랫동안 여행 중인 여행객들이라 하신다. 커피 2잔과 빵 서너 개를 양 손으로 들고 몸으로 문을 밀어 나오려 하는데 백발의 할아버지 한 분께서 벌떡 일어나셔서 친절하게도 출입문을 열어주시더라. 낯선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보이고, 악의없는 조크 좋아하고 상냥(?)하고 친절한 미국의 이런 면은 참 좋다!
숙소를 빠져나와 가까운 주유소에서 기름을 만땅으로 채운다. 갤런당 3.01불. 지금껏 주유한 곳 중 가장 싸다. 원래 계획은 66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도중에 I-40으로 합류하는 것이었으나 깜박하여 내비가 추천하는 경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바로 I-40을 타버린 것이다. 수십 마일을 주행하고 나서야 아차하고 생각이 났으나 차를 되돌리기도 그렇고, 아쉽지만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덕분에 미 서부 개척사의 숱한 애환이 서려 있는 옛 Route 66을 주행해 보려던 계획은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다.
NIKON D800 | Aperture priority | 1/400sec | F/8.0 | 0.00 EV | 85.0mm | ISO-100 | 2014:02:09 12:43:57 ▲ 투사얀 근처에 이르니 사막지형은 끝나고 이런 울창한 숲 길이 나타난다.
윌리엄스와 투사얀을 거쳐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에 사우스 림 비지터 센터에 도착하였다. 주차 후 먼저 방문자 센터를 둘러보며 대협곡의 생성 과정 등 자연 공부를 잠시 한 후 가장 가까운 매써 포인트(Mather Pt)로 나가 보았다. 그랜드 캐년은 세 번째 방문이지만, 올 때마다 느끼는 경이로움은 그대로다. 지금까지 계속 평지로만 질주해 왔는데, 저 심연을 알 수 없는 아득하고도 거대한 계곡이 떡 하니 나타날 줄이야! (사실 지금껏 주행해 온 길은 콜로라도 고원(Colorado Plateau)의 일부여서 해발 고도가 상당히 높은 곳인데, 산이 없고 밋밋하여 고도를 느끼기 어려웠다. 매써 포인트만 하더라도 해발 2,170m로서,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보다 훨씬 높은 곳이다).
Kodak DCS Pro 14n | Aperture priority | 1/350sec | F/8.0 | 0.00 EV | 24.0mm | ISO-80 | 2014:02:09 14:07:09 ▲ 사우스 림의 대표 명소인 Mather Point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장관을 지켜보고 있다.
그랜드 캐니언은 콜로라도 고원이 오랜 세월동안 침식되어 형성된 거대한 계곡이다. 계곡 아래를 흐르는 콜로라도 강의 길이는 총 446km, 계곡의 최대 깊이가 1,600m, 계곡의 가장 넓은 폭이 무려 29km에 이른다고 하나, 수치만으론 그 어마어마함을 짐작하기가 쉽진 않다. 직접 와서 생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기 전까지는 어떤 언어로도 형용하기 여러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를 읽어보니 이 곳의 풍광이 너무도 장엄하여 오히려 아무 감흥이 일어나지 않더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공감이 간다.
Kodak DCS Pro 14n | Aperture priority | 1/125sec | F/8.0 | 0.00 EV | 38.0mm | ISO-80 | 2014:02:09 14:22:48 ▲ Mather Point
그랜드 캐니언은 지질학의 타임캡슐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이 계곡은 생성 연대별로 퇴적된 토양과 암석이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여 있는데, 대략 12~13층으로 분류된다. 우리가 밟고 있는 제일 높은 곳 표면의 지층(Kaibab Formation; 카이밥 형성물)은 가장 젊은 연령대에 속하는 반면, 협곡 바닥쪽으로 내려 갈 수록 오래된 노령의 지층이 되는 것이다. 콜로라도 강이 흐르는 기층(基層)인 비쉬누 기반암(Vishnu Basement Rocks)의 나이는 약 20억년, 최상층인 카이밥 형성물은 2억 7천만년 정도라고 하니 1,600미터에 이르는 계곡의 높이에 18억년이라는 시간차를 가지고 각각의 연대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각 지층별로 그 시대에 번성했던 다양한 종류의 생물 화석들이 출토된다고 한다. 저 계곡 아래로 떠나는 트레일은 무려 18억년에 걸친 시간여행을 하는 셈인데, 당연(?)하게도 우린 트레일 계획이 없다. 그냥 눈호강으로 만족하고 떠날 뿐이다.
NIKON D800 | Aperture priority | 1/320sec | F/8.0 | 0.00 EV | 86.0mm | ISO-100 | 2014:02:09 13:50:01 ▲ 매써 포인트 아래의 벼랑에 보이는 지층들. 저마다 층당 1~2억년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매써 포인트를 관람하고 나서 주위 벤취에서 점심 식사를 한 후 본격적인 그랜드 캐니언 구경에 나섰다. 예정대로 오늘 둘러볼 곳은 서쪽 허미츠 레스트(Hermit's Rest)까지 이동하면서 중간중간의 전망을 즐기는 것이다. 원래 개인 승용차는 진입하지 못하는 곳이지만 동계 비수기(12월~이듬해 2월)엔 셔틀버스를 운행하지 않아 이 기간 동안 한시적으로 개인 승용차 통행이 허용되는데 덕분에 허밋 로드의 서쪽 끝까지 기분 내키는 대로 머물고 떠날 수 있었다.
▲ 그랜드 캐니언 사우스 림의 서쪽 개념도(출처:미 국립공원 공식 사이트)
오늘 우리가 집중 감상(?)할 부분의 맵. 지도상의 맨 우측에 방문자 센터가 있고, 왼쪽 방향으로 매써 포인트, 야바파이 포인트가 보이고, 붉은 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웨스트림으로 불리기도 하는 셔틀버스의 허밋 로드이다(정확하게는 허미츠 레스트 루트(Hermit's Rest Route) 셔틀버스가 운행하는 노선도임). 각 포인트별 사진 몇 장을 아래에 게재해 본다.
NIKON D800 | Aperture priority | 1/200sec | F/11.0 | -0.67 EV | 32.0mm | ISO-100 | 2014:02:09 16:20:01 ▲ 피마 포인트(Pima Pt)를 지날 무렵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여 협곡의 측면에 석양을 비추니 안 그래도 붉은 협곡이 더욱 븕게 물든다.
호피 포인트(Hpoi Pt)엔 수많은 관람객들이 미리 진을 치고 일몰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해가 지자마자 기온이 급강하하여 무척 쌀쌀해지니 모두들 두터운 패딩 점퍼를 입고도 덜덜 떨면서 저 협곡 너머로 해가 떨어져 숨는 순간까지 자리를 뜨지 않는다. 이 일몰 장면을 마지막으로 우린 다시 남문을 빠져나와 윌리엄스와 투사얀의 중간 지점인 발레에 있는 숙소에 투숙하여 하루를 마감한다. (02.09. 일정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