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칠순을 기념하기 위해 40대 중반의 아들과 칠순의 어머니가 단둘이 미국 서부로 가서 2주라는 꽤 긴 시간에 걸쳐 하이킹으로 점철된 여행을 한다는 컨셉은 사실 제가 생각해도 좀 특이하기는 했습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원래 계획은 저 혼자 가는 것이었지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따라 어머니와 함께 이뤄진 여행이었습니다. 제 주변에서도 이번 여행 계획을 듣고서는 각양각색의 반응들이 나왔었는데 그래도 대부분의 반응은 참 부럽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상당히 까다로운 선행 조건들이 충족돼야 실현될 수 있는 여행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다양한 하이킹 일정을 (견디는 것이 아닌) 즐길 수 있는 체력이 되어야 했었고 또한 어머니가 나름 척박한 미국 서부 여행의 다양한 악조건(매일 땡볕에 흙먼지 풀풀 날리는 미국 서부의 어찌 보면 삭막할 수 있는 환경, 시차 적응, 장시간의 차량 이동, 매일 바뀌는 숙소, 점심은 거의 매일 서브웨이 샌드위치로 먹어야 하는 상황 등)을 견딜 수 있어야 했구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모자가 2주 동안 달라붙어 지내면서도 큰 싸움 나지 않고 즐겁게 지낼 수 있는 정서적 관계도 존재해야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의외로 장성한 자식들이 나이 드신 부모님과의 여행을(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경우가 꽤 많았고 막상 여행을 가서도 중간에 의견 충돌로 인해 서로 핀트가 틀어지는 경우도 봤습니다. 다행히도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면서 즐거운 여행을 하면서 많은 추억을 쌓을 수 있었고 또한 여행 중간에 아무런 문제 없이 원래 계획대로 여행을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모두들 자식으로서 어머니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쯤은 있을 것입니다. 2018년도에 여행을 끝내고 facebook에 올린 아래 짧은 글과 2018년도 미국 여행 가기 전 제가 폐렴에서 회복되고 난 이후 어버이날에 facebook에 올렸던 글이 이번 여행에 대한 저의 Epilogue로 적당할 것 같습니다.

Epilogue 1

내가 어렸을 때 김청기 감독이 제작한 만화 영화가 한참 인기였다. 나는 당근 부모님을 졸라서 영화를 보여 달라고 떼를 썼을 것이 분명했다. 당시에 만화 영화 상영관은 일반 영화관이 아닌 항상 시민회관이었다. 아마도 일반 영화 상영관은 애마부인 시리즈 아님 뽕 시리즈 영화를 틀어대느라 바빴던 것 같다.

어머니가 나와 여동생을 시민회관으로 데리고 가셨다. 근데 막상 영화가 시작될 때 어머니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시고 나와 여동생만 시민회관 안으로 들여보내셨다. 그러면서 본인은 이런 영화는 재미없어서 그냥 밖에서 기다릴 터이니 재미있게 보라고 말씀하셨다.

나와 여동생은 아무 속도 모르게 네~ 대답한 후 뒤도 안 보고 시민회관에 들어가 영화를 보면서 낄낄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 중간 정도에 어머니가 시민회관 안으로 들어오셨다. 어? 왜 들어오셨어요라고 난 여쭤보았고 어머니는 어 그냥 들어왔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중에 매표인이 혼자 시민회관 입구 앞 의자에 앉아 밤늦은 시간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를 발견한 후 그냥 표 값을 받지 않고 애들하고 같이 들어가서 보세요라고 해서 들어오게 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난 위 기억이 어떻게 해서 내 어린 시절 모든 기억 가운데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항상 제일 먼저 떠오르는 가장 강력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모른다. 아마 어머니께서 집안 형편은 넉넉지 않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애들만이라도 시민회관으로 들여보내 남들한테 꿀리지 말라고 김청기 감독 만화 영화 보여주신 그 마음이 어린 나한테도 크게 남았던 것 같다.

지금껏 커오면서 그때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을 어떻게나마 좀 상징적으로 보답해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항상 남아 있었다.

이번 2주간 어머니와의 여행이 그간 어머니가 나와 여동생에 퍼부어 주신 사랑의 크기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내 개인적으로는 어머니의 일방적인 자식 사랑에 대해 자식으로서 어머니께 약간이나마 보답을 해드린 그런 여행이었던 것 같아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번에 이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면 어쩌면 이런 기회를 어머니 살아생전 한 번도 만들지 못했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Better late than never. 인간관계에 있어서 뭘 해 주고 싶으면 바로바로 해야 하는 것 같다. 특히 부모님께는. 부모님의 시계는 자식들의 시계보다 항상 너무 빨리 흘러간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Epilogue 2

어버이날 - 이명과 어머니

폐렴 입원 도중 몸의 면역력이 붕괴되면서 귀에 이명이 왔다. 지금도 낫지 않고 나를 괴롭히고 있다. 내 이명 증상은 귀에서 삐—하는 고음의 소리가 계속 들리는 증상이다. 다행히 다른 경우처럼 물이 흐르거나 벌레가 울지는 않는다.

이명이 온 직후 모든 사람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두 옥타브 정도 높게 들린다. 심지어 나 자신의 목소리도 와이프 목소리도 모두 이상하게 들린다. (특히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로 사람을 분간하는 일은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좋아하는 음악 소리도 이전과 너무 달라졌다. 그 달콤하던 음악이 이명 이후에는 마치 귀에 모래를 털어 넣는 그런 느낌으로 변질되었고 그로 인해서 3주 넘게 음악을 못 듣고 있다. 누구 말마따나 인생이 낙이 없다......

그 와중에 가장 마지막까지 이명 이후에도 이명 이전과 똑같은 목소리로 들리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그건 옆에서 일주일 넘게 병간호해 주셨던 어머니 목소리였다. 아주 희한한 경험이었다. 약간은 영적인 경험 비슷했다. 물리적으로 분명히 귀에 문제가 생겼고 그로 인해 모든 소리가 왜곡되어 들리는데 왜 어머니 목소리만 이전과 똑같이 들린단 말인가?

다른 사람이 아닌 어머니의 목소리는 내 육신이 지쳐있던 극한의 상황에서 더 이상 귀를 통해서 듣는 것이 아닌 마음을 통해서 들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어떤 백 마디 말보다 이번 단 한 번의 경험이 지금까지는 몰랐던 엄마와 아들의 본질적인 관계를 아주 쉽고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다.

엄마와 아들의 관계는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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